Hanbange 3.0 - (C) Breadu Soft 2008

테레지엔슈타트에서

이번에 저희는 동쪽으로
이동했어요

 

소를 운반하는
화물칸에 실려서

 

루스 엘리아스(이스라엘)
1943년 체코 테레지엔스타트에서 강제추방

 

이틀을 그렇게 갔어요

 

- 이틀째 되는 날 밤에...
- 겨울에요?

12월이었어요

그래도 안은 따스했어요

온기를 만들었어요

서로 모여서
체온으로 몸을 녹였어요

 

어느 날 밤에
열차가 멈췄어요

이틀째 밤에

 

차문이 열리자마자

엄청난 고함 소리가 들렸어요
"나와, 나와, 나와!"

 

다들 소스라쳤어요
여기가 어딘지 무슨 일인지

 

저희 눈엔 개를 데리고 있는
SS들만 보였어요

멀리서부터
불빛들이 쭉 비췄어요

대체 거기가 어딘 지

저 수많은 불빛들은
뭔지 의아했어요

계속 고함은 질러대지
"나와,나와,나와!"

소 몰듯이?

네, 정말 그랬어요

"빨리,빨리,빨리" 하면서

 

찻칸에서 내려
다들 줄지어 섰어요

그 때

줄무늬 옷의 사람들이
보였어요

그 줄무늬가 뭔지
전혀 몰랐어요

제가 어떤 사람한테 체코어로
여기가 어디냐고 물어봤어요

폴란드 사람인데 체코어를 알아들었는지
'아우슈비츠'라고 하더군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몰랐어요

아우슈비츠가 뭔지
알 도리가 없었죠

 

우리는 B2B 구역의
'가족수용소'라는 곳으로 갔어요

아이들과 남자,여자
모두 함께

 

아직은 심사 되지 않은 채

 

남자 수용소에서 온 사람들이

 

우리한테 와서는
그랬어요

"아우슈비츠는
죽음의 수용소다

 

여기서 사람들을
태워 죽인다"

 

우리는 그 말을
믿지 않았어요

 

그 가족수용소에는
테레지엔슈타트에서 9월에

3개월 전에
온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 사람들도
믿지 않았어요

여태 아무도 안 끌려갔고
태운 적 없었으니까

전혀 믿지 않았어요

 

그 사람들은
체코계 유대인들로

프라하 근처의 게토
테레지엔슈타트에서 왔어요

그 사람들은 다 특별구역 중 하나인
B2B에 수용 됐어요

2B

 

당시 나는 B2A 에서
등록 업무 일을 했어요

 

B2A 와 B2B 사이엔
전기 철조망이 쳐져 있었어요

 

넘나들 수는 없지만
대화는 가능 했어요

 

어느 날 아침
등록 명단을 점검하다가

아주 놀라운
상황을 발견했어요

 

가족들과
남자,여자,아이들이

다 함께 있으면서
아무도 가스실로 가지 않았어요

 

짐들도 막사에
그대로 지니고 있었고

 

삭발도 안 당하고
원래 머리 그대로

 

이건 뭔가
다른 상황이었어요

여태껏 보지 못했던
특별한 경우였어요

 

도무지 짐작이 안 갔지만
아무도 몰랐어요

그런데 중앙 등록실
사람들 말로는

이 사람들한테 모두
특별카드가 있다고 했어요

다음과 같은 꼬리가 붙어서

 

"SB,6개월 간 격리"

 

SB는
'특별대우(Sonderbehandlung)'로써

가스실을 말하겠죠

 

격리라는 말도
그런 뜻이겠고

 

도무지 모를 일이었어요

 

사람을 6개월씩이나
대기 시켰다가 가스실로 보낸다니

 

'SB'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겠죠

이 'SB'의 뜻이

그냥 가스실 보류인지
또 다른 의미가 있는 지

 

6개월이면
3월 7일이 만기였어요

 

12월에

12월 20일 경에 테레지엔슈타트에서
수송이 한 차례 더 있었어요

그 때도 4천 명 정도가
온 걸로 기억됩니다

먼저 온 사람들과 같이
B2B 수용소에 합류했어요

이 사람들도 남녀와 아이들이
함께 지냈어요

젊은이와 노인들
모두 함께요

머리도 그대로고
짐도 그대로

입고 왔던
옷차림 그대요였어요

확실히
다른 대우를 받았어요

특별막사에
아이들 학교도 짓고

거기서 아이들이
연극 공연도 했어요

물론 아주 안락한 생활은
아니었어요

몹시 비좁았고

6개월 동안
먼저 온 4천명 중에

천명이 사망했어요

- 1천명이...
- 노역을 했습니까?

네,하긴 했어도
수용소 내의 일이었어요

막사들 사이로 길을 내던가
새 막사를 짓던가 하는

SS들은 편지도
쓰게 했어요

편지를 써서

테레지엔슈타트 게토의 친지들에게
안부를 전하게 했어요

- 식량 사정도 좋았습니까?
- 네,썩 괜찮았고

대우도 더 나았어요
아주 좋은 조건이었어요

6개월 동안
노인과 아이들을 포함해

사망률이 1/4 밖에 안됐으니
아우슈비츠에서는 특별한 환경이었죠

 

SS들은 아이들의 연극 공연을
보러 오기도 하고

놀아주면서
친분을 쌓았어요

 

물론 등록 일을 하면서
제 임무 중 하나가

수용소 안에서
저항 활동에 가담할만한

사람들을 찾아
접촉하는 것이었어요

그때 이미
저항 조직의 일원으로...

네,네,그랬어요

직책이 그래서 그나마 좀 자유롭게
수용소 안을 돌아다녔어요

제 구역에서 중앙 등록실까지
서류를 전달한다던가

가끔씩 사람들의 소식을
서로 전해주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수용소 안에서의 제 임무가

이전의 레지스탕스 활동가나

저항 조직에 합당한 인물을
물색 하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곧

전 스페인 국제여단원
몇 명을 찾아냈어요

 

그리고 얼마 안가
40명 가량의 명단을 확보했어요

 

이전에 반 나치
레지스탕스 활동의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그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이

프레디 히르쉬라는
인물입니다

 

독일계 유대인으로

독일에서 프라하로
이민을 온 사람이었어요

 

프레드 히르쉬는
특히 수용소의 아이들의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어요

 

아이들 이름을
다 알았어요

 

그 올바른 자세와
인간적인 품성 때문에

 

가족수용소 전체의
정신적 지주가 됐어요

 

이제 3월 7일이
가까와지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 지

 

어떤 예감 같은 게
느껴졌어요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제 5 화장장

 

2월 말 경에

 

저는 제 5 화장장
야간조였습니다

 

자정 쯤에
정치부에서

 

사람이 왔는데

 

후스테크 하사관이었습니다

 

와서는 포스 하사관에게
쪽지를 전달 했습니다

 

그 때 포스가
화장장 네 곳의

 

책임자였습니다

 

보니까

 

포스가 쪽지를 펴들곤

 

중얼대더군요
"그래,늘 포스지

 

포스 없인 안되지
안되고 말고"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내게 그러더군요
"반장(kapo)들 오라 그래"

 

가서 쉴로이메 반장과

 

바첵 반장을 데려왔습니다

 

온 사람들한테 물었습니다

 

"몇 점이나 남았나?"

 

시체를 말합니다

 

"500점 쯤 남았습니다"
하니까

 

"아침까지 500점을
다 재로 만든다"

 

하면서

 

"정확히 500점인가?"

 

"그 정도 됩니다"

 

"이 새끼야!
정도가 뭐야"

 

그리고는 직접

 

'탈의실'로
확인하러 갔습니다

 

거기 시체를...

 

거기 쌓아 두었습니다

 

제 5 화장장의 탈의실은

 

시체 창고로도
쓰였습니다

 

가스실에서 나와서요?

 

가스실의 시체들을
거기에 끌어다 놓습니다

 

포스가 수를 세는데

 

깜빡 쪽지를

 

탁자 위에 남겨 뒀습니다

 

재빨리 훝어 보다가

 

그만 소스라쳤습니다

 

비르케나우
재의 호수

 

화장장은 체코 가족수용소의

 

'특별대우' 인원들을
화장할 준비를 할 것

 

아침에
주간조가 왔을 때

 

카민스키 반장한테
달려 갔습니다

 

'특무대원' 중
레지스탕스 지도자였는데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 사람 말로는

 

제 2 화장장도

 

준비를 마쳤다더군요

 

소각로도
준비를 끝내고

 

저한테 권했습니다

 

"친구와 동향인들한테 가서

 

자물쇠를 따고
이동하라고 전해

 

수용소의
다른 구역으로 가라고

 

무슨 일이 있을 건지

 

경고를 해줘

 

지금 손쓰지 않으면
화장장의 재가 될 거라고

 

사람들한테 일러줘

 

또 즉시 있던 막사를

 

불태우라고 전해줘"

 

그 날 밤이면
모두 가스실로

 

직행하리라
생각한 겁니다

 

하지만 야간조를 호출하지 않아
겨우 안도했습니다

 

기한이 며칠

 

연기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체코의
가족수용소 사람들을 포함해

 

많은 수용자들이
우리를 비난 했습니다

 

헛소문을 퍼뜨려서
사람들을 겁줬다고

 

2월 말 경에

나치들이
소문을 퍼뜨렸어요

가족수용소 인원들을

하이데브렉이라는 곳으로
이동 시킬 거라고

 

그러면서 먼저

처음에 왔던 이들을
나중에 온 이들과 떼어놓고

사람들을 밤 사이에

 

B2A 격리 수용소로
옮길 거라고

저는 등록 일 때문에

 

사람들과 직접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어요

 

프레디 히르쉬에게
구체적으로 말했어요

함께 지내는 가족수용소의
체코 유대인들이

격리 수용소로
옮겨지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건 예정 날짜인

3월 7일에 가스실로 갈 가능성이
있는 거라고 했어요

 

확실한 거냐고 하더군요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했어요

당시 아우슈비츠 외부로 열차가 나갈
계획이 없기 때문이었어요

대다수 등록실 인원들은
저항 조직원들이었어요

아우슈비츠에서 나가는

열차 정보가 있었다면
벌써 전해졌을텐데

그런 정보는 없었어요

제가 상황을 설명했어요

이 일이 무엇을 뜻하며

어떤 일이
일어 날 수 있는 지

초반에는
가족수용소 사람들에게

웬만큼
건강 유지를 시켜주고

도덕심 같은 걸
발휘했지만

죽일 것은 자명하다

그게 이 수옹소의
통상적인 몰살 과정이며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걸 안 이상
그렇게 놔 둘 순 없지 않느냐

바로 지금이
행동할 때다

 

물론 그 행동은...

 

당하는 사람들이
나서야 한다

 

모두들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고

화장장에서 일하는
'특무대원'들도

점차 물갈이 되는 마당이라

기꺼이 나설 것이다

가스실로 가는 체코계 유대인들이
SS를 공격하면 가담할 것이다

 

프레디 히르쉬는 반대 했어요
사리에 안 맞는다

말이 안 된다고 하면서

독일인들이
6개월 동안

아이들에게 우유와
빵을 줘가며 잘 지내놓고

지금 어떻게
가스실로 보내겠느냐는 거죠

 

다음날 저항조직 측에서
다시 소식이 왔어요

 

사람들이 가스실로 갈게
확실하다고

 

'특무대원'들이 이미
연소 시킬 석탄을 운반해왔다고

 

특무대원들은
정확히 알고 있었어요

얼만만큼의 인원이
가스실로 가고

어디 사람들인지
엄격한 규칙에 따른 거니까

 

프레디한테 다시 찾아가
설명을 했어요

그를 포함해
같이 수송된 사람들이

48시간 안에 가스실로
갈게 분명하다고

 

그러자 갑자기
걱정을 하더군요

봉기를 하게되면

애들은 어떻게 되느냐고

- 애들과 상당히 친해서...
- 아이들은 얼마나...

한 100명 정도였어요

 

- 살아남은
- 몇 명이나 싸울 수 있었습니까?

핵심 인원은 한 30명가량

그런 걸 따질
계제가 아니었어요

하기 나름이지

일단 싸움이 시작 되면
할머니들도 돌을 들 수 있고

누구나 싸울 수 있는 거라
가늠하긴 어렵죠

하지만 핵심 인원들에겐
주동적인 인물이 필요 했어요

이런 세세한 사항들이
중요한 겁니다

 

프레디가 다시 물었어요
봉기하면

아이들은
대체 어떻게 할 거냐고

 

누가 애들을
데려 나가느냐고

아이들에 관해서는
확실히 말 못하겠다

하지만 다른 수가 없다
고 했어요

 

그 상황에서 아이들은
분명히 죽게 돼있었어요

손쓸 도리가 없죠

우리가 할 일이란

그냥 아이들과
같이 죽던가

아니면 SS들을 몇 명이나
죽이고 죽느냐였죠

또 어떻게 그 죽음의 공정에
제동을 걸고

거기 더해
그 싸움의 와중에서

어떻게 수용소 밖으로
빠져나가느냐 였죠

 

그런 상황이라면
못할 것도 없죠

 

경비들을 뚫는 일
말입니다

일단 싸움이 벌어지면
무기를 입수할 수도 있을테니

프레디한테 말했어요

함께 수송된 사람들에게는
기회가 절대 없다

정확한 정보로
그 모든 사람들이

48시간 뒤에
살아남을 확률은 없다

- 구역 안에 이야기 할 데가 있었습니까?
- 구역 안의 제 방이요

 

또 이런 이야기도 했어요
그가 중심 인물로 지명 됐다고

프레디는
상황은 이해가 가지만

아이들 때문에
결정을 내리기 힘들다고 했어요

아이들의 운명을
그렇게 방치할 수는 없다면서

 

그는 그 애들
아빠나 다름 없었어요

그때 나이 30살이었지만

아이들 과의 관계는
정말 끈끈했어요

그리고는 제 말에도
일리가 있다면서

생각을 좀 해본다고
했어요,1시간 정도

1시간쯤
혼자 있게 해달라고

그 때 등록실에
일이 좀 있어서

프레디를 혼자 두고
나왔어요

제 방에는
탁자와 의자,침대

또 필기도구 같은 게
있었어요

1시간 뒤에
돌아올거라고 하고선

나중에 와봤더니

침대에 누워
죽어가고 있었어요

백짓장 같은 얼굴에
입엔 거품을 물고

독약을 먹은 것 같았어요

독약을 먹었어요

 

프레디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는데

어떤 독약을 먹었는 지도
몰랐어요

 

하지만 클라이만이라는
의사를 알고 있었어요

클라이만 씨는 폴란드 계
프랑스 유대인으로

의술이 뛰어났어요

그래서 클라이만씨를
즉시 데려와

상태가 어떤 지
물어봤어요

중요한 인물이었으니까

 

클레이만은
프레디를 살펴보더니

다량의 바르비투르산염을
복용해

목숨을 구할 수
있을 진 몰라도

 

제대로 일어서러면
오래 걸린다

48시간 안에
가스실로 갈 처진데

그대로 손대지 않고
놔두는 게

낫겠다고 하더군요

 

프레디가 자살한 뒤
상황이 급박해졌어요

먼저 다른 이들한테
히르쉬한테 말한 내용을 전한 다음

2D 수용소로 가서
저항조직과 접촉했어요

저항조직 측 인물과

그쪽에서는 빵을 주더군요
사람들 주라고

빵이요
빵과 양파

그러면서
아직 어떤 결정을

내릴 지 모르니

나중에 지침을
주겠다고 하더군요

와서 빵을 나눠주는데
일이 생겼어요

수용소에
특별 통금령이 내려

사무실 일도
다 중단 됐어요

경비를 2배로 늘리고

격리수용소 쪽에서
기관총 소리가 울려퍼졌어요

저도 발이 묶였습니다

가족수용소의 체코인들은
저녁에 가스실로 보내졌어요

트럭에 타고 나서야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제 발로 올라들 갔어요
고분고분

물론 트럭이 어디로
향하는 지 몰랐죠

SS들은 하이데브렉으로
간다고 했어요

가스실이 아니라

우리는 트럭이
가족수용소를 나가

왼쪽으로 꺾을 줄
알고 있었어요

그 왼쪽이 목적지였어요

500 야드 거리의 화장장

 

그 날 밤
제 2 화장장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조명등으로
눈을 못뜨게 비추고는

 

통로로 밀어넣어

 

'탈의실' 계단을
오르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못 보면서
허둥지둥 쫓겨 다녔습니다

 

매질이 퍼부어졌습니다

 

빨리 움직이지 않는다고
SS들한테 죽도록

 

얻어 맞았습니다

 

유별나게 극심한
폭력이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아무 말도 없이...?

 

한마디도 없이
차에서 내리는 순간

 

SS들이
무작정 때렸습니다

 

사람들이
'탈의실'로 들어올 때

 

뒷문 근처에 있던 저는

 

거기 그대로 선 채로

 

그 무시무시한 광경을
목격 했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은

 

그제야
눈치를 챘습니다

 

기둥에 써붙인
이른바

 

국제 관광안내소
같은 모습에

 

소스라쳤습니다

 

그 문구들을
믿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B2B 수용소에 있으면서
들은 겁니다

 

다들 절망에 빠져
아이들은 엄마한테

 

딱 달라붙었고

 

부모네와 노인들은

 

대성통곡 했습니다

 

그 순간 돌연

 

계단에 SS 장교들 몇이
나타났는데

 

수용소장인
쉬바르츠위버도 있었습니다

 

소장은 장교들을 시켜

 

사람들이

 

하이데브렉으로
갈 거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입모아

 

울면서 애원 조로
소리쳤습니다

 

"하이덱브렉은 속임수에요!

 

우릴 속였어요! 살려주세요!
일할게요!"

 

그러면서 SS 사형집행자들을
바라봤지만

 

SS들은...

 

그저 무표정하게

 

서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자 동요가 일었습니다

 

사람들이 SS 장교들과
수용소장한테 달려가

 

왜 속였는 지
따질 모양이었는데

 

경비들이
앞으로 나와

 

곤봉을 휘두르는 바람에

 

부상자가
더 생겼습니다

 

'탈의실'에서?

 

'탈의실'에서

 

이젠 마구 매질하면서

 

사람들의 옷을
억지로 벗기려고 했지만

 

몇 명만 따랐습니다

 

극소수 몇몇만

 

다들 명령에 따르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합창이...

 

합창처럼...
노래가 시작 됐습니다

 

'탈의실'이
쩡쩡 울리도록

 

체코어로
유대 국가인

 

"희망(Hatikva)"이

 

저는 그만
가슴이 메어져서...

 

참,못하겠군요...

 

동족들이
그 지경을 당하는데...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냐고

 

왜 사냐고?
뭘 위해?

 

그래서 사람들과 함께
가스실로 들어갔습니다

 

그 사람들과 같이

 

죽을 결심으로

 

그런데 저를 알아보고
몇 사람이 다가 왔습니다

 

자물쇠 담당인 동료와
몇 번

 

가족수용소에
드나들 때 본 겁니다

 

여자들 몇 명이
다가와서는

 

가스실 안에서
저를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가스실 안에
들어가셨군요?

 

한 여자가 말했습니다

 

"죽으려는 거군요
의미없는 짓이에요

 

같이 죽는다고
우리가 살아나나요

 

그 길이 아니에요

 

반드시 여기서
살아나가서

 

증언을 해줘요
우리가 얼마나

 

참혹하고
부당하게 죽어갔는 지"

 

그렇게 체코에서 수송된
1진은 끝이 났어요

 

이제 분명해지더군요
수용소의 저항조직은

 

봉기가 목적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싸웠어요

 

조직원들의
생존을 위해서

 

그때 저는 결정했어요
조직에서 말하는

무정부주의적인
개인행동을 하기로

그때까지는
공동운명체였던 곳을

등지고 떠나기로

 

루돌프 브르바와
친구인 베츨러는

 

1944년 4월 7일
탈출했다

 

이전에도 그런 사례가 있었지만
모두 체포 됐었다

 

당시 탈출 시도는

저항조직의 방침에
반하는 것이었지만

 

재빠르게

친구 베츨러와 만반의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어요

그 친구가 아주
중요한 역활을 했어요

 

떠나기 전
후고 레넥과 대화를 했는데

체코에서 수송된 2진의
저항조직 2인자 격인 사람이었어요

 

이렇게 말해줬어요

이제부터는 저항조직에서
아무 것도 기대하지 말라

 

빵 말고는

 

죽을 때가 닥치면

스스로 행동해야 한다

 

그 탈출에 관해서라면

내가 무사히
수용소에서 탈출해

그곳의 정보를 제 때
제대로만 전한다면

그 행동으로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죠

 

또한 확신했어요

 

이런 사태가
가능했던 게

아우슈비츠로 왔던
희생자들이

여기서 일어나는 일들을
몰라서였다고

 

혹은 밖에서
흘려듣긴 했어도...

 

그 정보라는 게...

 

몰랐었다는 게
제 느낌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이 사실을 알리려고 했어요

유럽 지역이나
특히 헝가리에

 

그 때 이미 1백만의 유대인들이
5월에 아우슈비츠로

오게 되리란 걸
알고 있었어요

 

내 이야기가
외부의 레지스탕스 조직에 전해지면

 

아우슈비츠도
직접 도움을 받지 않을까 여겨서

탈출 계획을 짰고

 

마침내 4월 7일
탈출하게 됐어요

행동을 취한
주 동기가...

분명 그 때였어요
그게 중요했어요

더 지체할
시간이 없었어요

최대한 빨리
탈출해야 했어요

 

세상에 알리기 위해

- 무슨 일이 있는 지를? - 네
- 아우슈비츠에서 - 그렇죠

 

이제 35년 전으로
돌아가자는 건데...

 

아니,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그 일이라면...

 

얀 카르스키
미국 조지타운대 교수

 

전 폴란드 망명정부 밀사

 

- 이제 합시다
- 좋습니다

 

1942년 중반

 

밀사 일을
계속하려고 생각했습니다

폴란드의 지하조직과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
사이에서

 

바르샤바의 유대인 대표들과도
접촉 했습니다

게토 밖에서
만남이 이뤄졌습니다

 

두 신사가 나왔는데

게토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자기 소개들을 했는데

 

'동맹'의 대표와

시오니스트의
대표라고 했습니다

 

이제

당시 상황과 그때의 대화 내용을
이야기 할텐데

먼저 채 준비가 안된
상태입니다

상당히 고립된 상황에서
폴란드에서 임무를 수행했고

별로 많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

 

또 전후 35년 동안

 

그때로 돌아간 적이 없습니다

26년 동안
교직에 있으면서

단 한 번도 유대인 문제를
학생들에게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이 영화를 이해 합니다

역사적 기록인만큼
애써보겠습니다

 

두 사람은 당시 유대인들이
처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아는 이야기였는가
아니,몰랐습니다

 

우선 말하기를

"지금 유대인 문제는
전례가 없는 것이며

폴란드나 러시아

그 어떤 문제와도
비교할 수 없다

히틀러는 이 전쟁에서
패배하겠지만

 

전 유대인을
몰살할 것이다

이걸 알겠는가?

 

연합국은 자국민과

인류를 위해 싸우고 있지만

이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폴란드에서 유대인들이
몰살 당하고 있다

폴란드와 유럽 유대인들이"

 

두 사람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방을 왔다갔다 하면서
중얼거렸습니다

씩씩거리면서

 

악몽이었습니다

 

저한테는

아주 필사적인
모습이던가요?

네,그러니까
이야기 도중에

자제력을 잃기도
했습니다

저는 의자에 앉아
듣기만 했습니다

아무 반응도 않고
아무 질문도 없이

듣기만 했습니다

 

- 그러다가...
- 납득 시키려던가요?

다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애초부터 모두

제가 이 문제를 전혀 모르고
이해 못한다는 사실을

제가 소식을
전해주겠다고 하자

당시의 유대인들의
사정을 알려주려고 했습니다

게토에 가본 적이 없어서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누구한테서 유대인들 일을
들은 적도 없고

 

당시 바르샤바의 유대인들이
살해 당한다는 걸 모르셨습니까?

알기는 했지만
본 게 있어야 말이지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
제대로 이야기를 못 들었고

가보지도 못 했습니다

아는 거라곤
통계자료 뿐이었습니다

수천 수만이
폴란드에서 살해 당하고

러시아나 세르비아
그리스에서도 그런다는

통계 상의 일이었을 뿐

 

그쪽에서는
정말 특별한 상황이라고 계속...

네,사태의 심각성을
저한테 심어줘야 했으니까요

그래야 제가 다른 이들을 만나
그 절박성을 전달할테니까

"유대인의 현 상황은
역사적으로 전례가 없다

이집트의 파라오들도

바빌로니아인들도
이러지는 않았다

실로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결론적으로

연합국이 전례 없는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전쟁의 결과에
관계없이

유대인들은 전부
몰살될 것이다

그렇게 놔두겠는가"

 

그렇다면 그쪽에선
어떤 특별 조치를...

네,그런데
중구난방이었어요

'동맹' 대표는 이렇고

또 시오니즘 대표는 저렇고

 

그래서
바라는 게 뭐냐!

어떤 메세지를 전달해야 하는냐
했습니다

그러자 전달사항을
말했습니다

다양했습니다

"먼저 연합국 정부에 가서

가능한 한 많은
정부 관리들을 만나고

그야 능력이
닿는 선에서

폴란드 정부와

폴란드 대통령

국제적인
유대 지도자들

 

영향력 있는 정치가들

주요 지식인들까지

가능한 많은 이들과
접촉하라"

그 다음엔 따로
말하더군요

만난 내용을
누구누구한테 전해라

악몽 같았어요
두 번 만났는데

악몽 같은
회합이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요구 사항을 꺼냈습니다

다양한 요구사항을

 

이랬습니다

 

"연합국이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을
더 허용하면 안된다

 

한시가 급하다

 

뉴욕

 

연합국은

 

이 전쟁을 단지 군사 전략의
관점에서만 다뤄서는 안된다

 

그런 입장을 견지하더라도

 

전쟁에서는 이길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들한테는
무슨 도움이 되나?

 

이 전쟁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마당에

 

연합국 정부는
그런 입장을 취해선 안된다

 

유대인들은
인류에 기여해왔다

수천년 동안
과학자를 배출 시키고

 

거룩한 신앙의 모체였다

 

우리는 인간이다

아느냐?
그걸 아느냐?

 

유대인들이 지금
겪고 있는 사태는

역사에서 없던 일이다

이런 사실이 세상 사람들의
양심을 일깨울 것이다

 

우리가 나라 없는 처지라는 걸
알고 있다

 

정부라는 게 없다

 

국제회의에서
발언권이 없다

 

그래서 당신과 같은
개개인의 힘을 빌어야 한다

 

하겠느냐?
접촉 하겠느냐?

 

연합국 지도자들을
만나는 임무를

 

완수 하겠느냐?

 

워싱턴

 

우리는
공식 선언을 원한다

 

연합국 국가들의

 

이와 더불어

 

승리를 담보하며

 

그 목표인 군사전략을

 

이 전쟁에서의
군사적 승리를

 

유대인 학살 문제는

다른 장으로 구분해서

 

연합국에서

 

공식적으로
공표 해주기를 원한다

 

이 문제를
전쟁 전반에서

연합국의 필수 전략의 일부로
다뤄주기를 요망한다

 

독일군을
격퇴 시킬 뿐만 아니라

 

살아 남은 유대인들을
구하기 위한

 

일단 공식 선언을
한 뒤에

 

항공기를 보내

 

독일을 폭격하고

 

수백만의 전단을
살포할 수도 있다

 

독일 국민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자기네 정부가 유대인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지

모르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다시 공식 선언해야 한다
공식적인

대중에게 공표하는

독일 국민들이
그런 증거를 보고서도

 

자기네 정부의 정책을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독일 정부가 저지른
유대인들에게 저지른 범죄를

 

독일 국민들
스스로 져야 한다

그리고서는

그런 징후가
보이지 않을 때는

 

공식적으로 공표한다

독일의 특정 지역을

폭격해
파괴할 것이며

 

이는 독일정부가 유대인들에게
저지른 행위에 대한 보복이라고

이 폭격의 단행은

군사전략의 일부가 아닌

오로지 유대인 문제로
다뤄져야 한다

폭격 이전과 이후에

독일 국민들이
이 사실을 알도록 해야 한다

 

이런 사태가
또 이어질 사태가

유대인들이 폴란드에서
몰살당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래야만
도움이 된다!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럴 힘이 있다!"

 

독일 루르 공업지대

 

이것이 임무 중
하나였습니다

 

다음으로

 

두 사람 모두

 

특히 시오니즘 대표는

 

다시 씩씩대면서
중얼거렸습니다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이다

 

바르샤바 게토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특히 젊은 층에서

 

싸울 것이다

 

벌써부터

제 3제국에
항전을 선언했다

 

역사에서 드문
전쟁이 될 것이다

 

이전에는 없었던 전쟁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려고 한다

 

이런 식의 죽음을
허용할 순 없다"

 

아무튼 그때 저는

유대인 군사조직이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해주지 않은 채

뭔가 터질 거라고만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싸울 것이다"

 

그래서
무기가 필요했습니다

 

"폴란드의 지하조직인

국민군(AK) 지휘부와

접촉을 시도했다

 

무장을 거부 당했다

 

무기가 있으면서도
거절하다니

무기가 있는 걸
다 아는데!

 

이런 내용이 총사령관인
시코르스키 장군에게 전해졌고

유대인들에게

무기를 지급하라는
명령이 내렸졌다"

 

아우슈비츠 - 비르케나우

 

또다른 임무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세계적인
유대인 지도자들이 있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한테 가
말을 전해달라

 

당신들은 유대인 지도자다

 

동족들이 죽어간다

 

이러다간
씨가 마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도자가 무슨 소용이냐?

우리도 죽을 운명이지만

도망가지 않는다
여기 머물 거다

 

사람들을 보내라

 

주요 기관으로 보내라

 

런던이든 어디든

 

행동을 촉구하라

 

그쪽에서 거부하면

 

거리로 나가서
버티라고 하라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말면서

 

죽게 놔둬라

 

인류애의 견지에서

 

세상의 양심을
일깨울 수 있지 않겠는가!"

 

두 유대인 대표 가운데

 

웬지

인간적인 면모로

'동맹' 대표한테
좀 더 끌렸습니다

 

그 사람의 행동거지
때문이었을 겁니다

마치 폴란드 귀족처럼

신사적이고 꼿꼿하고
우아한 몸짓으로

위엄을 보였습니다

그 사람도 저한테
호감을 가진 듯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사람이
제안을 했습니다

이러더군요
"비톨드 씨

 

나도 서구 세계를 압니다

 

이제 영국인들을
상대할 겁니다

 

여기 상황을 전달하면서

 

직접 본대로
이야기 한다면

분명 강력한 전달력을
실을 수 있을 겁니다"

 

바르샤바

 

"유대인 게토에
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가시겠습니까?

바르샤바의 유대인 게토에 가겠다면
동행 하겠습니다

 

신변 안전은
최대한 보장하겠습니다"

 

며칠 뒤에
다시 접촉을 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 게토는

1942년 7월 까지만 존재했고

더는 유명무실 했습니다

 

바르샤바 게토에 있던
40만 가량의 유대인 중

이미 30만이 다른 데로
추방된 뒤였습니다

 

게토를 둘러싼
장벽 안으로

 

4개의 다른 지구로
구분 되었는데

 

가장 주요 지구가 이른바
'중앙 게토'였습니다

그곳도 몇 개
구역로 나뉘어졌는데

어떤 곳은 전부터
아리아인들 거주지였는데

벌써 다시 돌아와
살고 있었습니다

 

거기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바깥 세상과
게토를 차단하는 장벽이

건물의 뒤쪽과 연결되는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마주 보는 앞 쪽이
아리아인들 구역이었습니다

 

거기 굴이 하나
나있었습니다

 

우리는 큰 어려움 없이
그 터널을 통과 했습니다

 

딴 사람이 된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폴란드 귀족 같던
'동맹' 대표 말입니다

같이 다니는데

 

축 쳐진 모습이었습니다

게토의 유대인들 모양
구부정히

전부터 여기
살던 사람처럼

분명히 그게
본 모습이었습니다

 

이곳이 그 사람의
세상이었습다

 

그 사람은
제 왼 편에서

같이 거리를 거닐었습니다

 

서로 별로
말이 없었습니다

 

이제 거리 풍경을
말해야겠지요?

 

벌거벗겨진 몸뚱아리를
봤습니다

 

물어 봤습니다
왜 저렇게 두는 지

- 시체 말입니까?
- 네, 시체

 

문제가 좀 있다더군요

 

"가족이 죽으면

묻어줘야 하겠지만

묻는 데도
세금을 매긴다

 

그래서 그냥
거리에 던져둔다"

세금을 낼 수 없어서요?

네,그럴 여유가 없기에

다음에 이러더군요

"누더기도 재산이라고

옷가지를 벗겨간다

임자 없는 시체가
거리에 버려지면

유대인회(Judenrat)에서
처리한다"

 

여자들과
아이들

남 보는데서
아기 젖을 먹이는데

 

젖가슴이 없이

그냥 밋밋했고

아이들 눈빛이
이상했습니다

 

아주 낯선 세계에
간 기분이었겠군요?

네?

딴 세상 말입니다

 

거긴 인간이 살만한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거리가 사람들로
꽉 찼는데

다들 거리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뭐라도 들고 나와
바꿔보려고

무슨 물건이든
팔아 보려고

 

양파 3개를 놓고
팔고 있고

과자 조금

팔거나
서로 구걸하고

 

배고파서 울고

 

지독했어요
그 아이들

 

홀로 나도는 아이들

 

엄마 곁에 앉은
아이들

 

인간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지옥에 가깝지

 

그러다가

 

게토의 그 구역에

 

중앙 게토에
독일군 장교가 나타났습니다

게쉬타포들이
게토를 드나들면서

중앙구역을
지나가곤 했습니다

독일 차들도
지나다니고

제복의 독일군이

나타나면
조용해졌습니다

지나갈 때까지
다들 얼어붙어서

꼼짝도 않고

구걸도 다 멈춘 채

독일인들!
그 경멸!

 

인간 이하의
족속을 대하 듯!

 

사람을 사람 같지 않게!

 

그러다 한 순간에

 

동요가 일었습니다

 

거리에서 유대인들이
달아나기 시작 했습니다

 

우리도 어떤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사람이,"문 열어요!
문 열어요!" 외쳤습니다

문이 열렸고
안으로 들어 갔습니다

거리 쪽으로
창이 난 문이라

뒷 문 쪽으로 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한 여자가
문을 열어줬고

"괜찮아요,괜찮아요
유대인들이니 안심해요" 했습니다

동맹 대표가 창으로 저를 데려가
"봐요,저걸 봐요!" 하더군요

 

두 소년이 보였습니다

 

준수한 얼굴에

히틀러 유겐트 제복 차림으로

 

걸어가는데

 

걸음을 뗄 데마다
유대인들이 사라졌습니다

도망 간 겁니다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가 싶더니

돌연 하나가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더니

눈 깜짝할 새

 

총을 쐈습니다

 

유리창 깨지는 소리와

내지르는 괴성!

 

다른 하나가 잘 했다는 듯
어깨를 쳤습니다

 

그리고 가버렸습니다

 

사지가 마비 됐습니다

 

집 안의
유대인 여자가

내가 유대인이 아닌 걸
눈치 챘는 지 어쨌는 지

 

붙들고는
"가요,가요

여긴 있을 데가 못 돼요
가요,가요" 하더군요

그 집을 나와

 

게토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그 사람이 이러더군요
"다 본 게 아니다

아직 덜 봤다

 

다시 가 보겠느냐

동행 하겠다

다 봐야만 한다"

 

그러자고 했습니다

 

이튿날
다시 갔습니다

같은 집의
같은 길로

 

이번엔
좀 단련이 됐는데

 

다른 게
느껴졌습니다

악취,악취

지독한 악취

 

어디를 가나
숨이 막혔습니다

 

불결한 거리

 

신경을 짓누르는
압박감

 

어떤 광기!

 

무라노스키 광장이었습니다

광장 한 구석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었습니다

 

넝마 뭉치 같은 걸
서로 주고 받으면서

그 사람이 그러더군요

"애들이 노는군요

살아갑니다
살아들갑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놀이 흉내죠
노는 게 아닙니다"

거기가 놀이터 같은...

무라노스키 광장
구석이었습니다

아니,공터였어요

- 그랬더니...
- 나무도 있었습니까?

몇 그루 있었습니다
그 곁에

나무들

우리는 그냥 거리를
쏘다녔습니다

남들과 이야기는 않고

 

1시간쯤
돌아 다녔습니다

 

이따끔씩
저한테 말을 했습니다

"봐요,저 유대인을

저기 꼼짝도 않고
있는 사람을"

 

죽은 건가 물었더니

"아니,아니
살아 있어요

 

비톨드 씨
기억해 두세요

지금 죽어가고 있어요

죽어가고 있어요
잘 보고

사람들한테 전해줘요!

본 걸 잊지 말아요"

그리고는 또 걷고

 

섬뜩했습니다

 

틈틈이 소곤댔습니다

"이걸 기억해둬요
이걸 기억해둬요"

 

또는 이러거나

"저 여자를 봐요"

 

그럴 때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물었습니다

대답 하기를

"죽어가는 겁니다
그래요,죽어가는 겁니다"

 

그리고 한결 같이

"기억해둬요
기억해둬요"

 

그렇게 1시간을 보내고

게토에서 나왔습니다

더는 견딜 수가 없어서

나가자고 했습니다

 

그 뒤론 그 사람을
다신 못 봤습니다

 

몸이 아팠습니다

 

지금도
그 때만 생각하면...

이 작업을 이해 합니다

그래서 여기 있고

그 기억 속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그래도 본대로
전했습니다

 

그곳은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의 일부가
아니었습니다

그 속에 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속에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없습니다

어떤 책에서도
이런 식의 현실을

어떤 연극이나 영화에서도

 

그곳은
인간세상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살고 있었지만

인간처럼
안 보였습니다

 

그렇게 헤어졌습니다

저를 안고 그랬습니다
"행운을,부디 행운을!"

그리곤
다시 못 봤습니다

 

바르샤바

 

프란츠 그라슬러

 

바르샤바 게토
나치 행정관 아우에르스발트의 부관

 

당시의 기억이 나십니까?

 

그다지요

 

전후의 등산여행 길은

 

기억이 생생한데

 

전시의
그 바르샤바 시절은 좀

 

별로 좋지 못한
기억이니까

 

사실 누구나
잊으려 하지요

 

좋은 기억이면 몰라도
안 좋은 기억은

 

거기 억눌리기보다

 

기억 하시도록
도와드리지요

 

바르샤바에서 아우에르스발트 박사를
보좌 하셨지요?

 

 

아우에르스발트 박사는...

 

바르샤바 유대인 지구
행정관이었지요

 

그라슬러 씨
이건 체르니아코프의 일기인데

 

선생을 언급했습니다

 

인쇄본으로 된...

 

네,보관 되어온 일기가

 

최근 출판 됐습니다

 

여기 1941년
7월 7일 자를 보면...

 

1941년 7월 7일이라
날짜를 다시 익히는군요

 

메모 좀 해도 되겠지요?

 

그러고보니
관심이 생기는군요

 

그래,7월에
벌써 거기 있었군!

 

"1941년 7월 7일

 

오전에 본부에서...
유대인회 본부에서...

 

아우에르스발트
쉴로서..."

 

쉴로서라면...

 

"그라슬러와

 

일과를 봤다"

 

여기서 처음...

 

제 이름이
나오는군요

 

어쨌든 셋이 있었는데
쉴로서는...

 

'재정부'였던가...

 

재정 담당이었을 거에요

 

그리고 두번째는...

 

7월 22일...

 

체르니아코프는
바르샤바 유대인회 회장이었다

 

매일 썼어요?

 

- 네
- 그래요?

 

네,매일

 

천만다행으로

 

그 일기가 보존 됐다니

 

남아 있는 게
놀랍군요

 

버몬트주 벌링톤(미국)
라울 힐버그

 

아담 체르니아코브는

 

독일군이 바르샤바에
들어오기 바로 전 주부터

 

일찍이 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유대인회 회장을
맡기 전부터죠

 

매일 일과를 적었어요

 

스스로 목숨을 끊던
날의 오후까지

 

그렇게 남긴 창을 통해

 

당시 몰살 과정의
유대인 사회의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죠

 

스러져가는 공동체

그 맨 처음 모습부터

 

그런 면에서

 

아담 체르니아코프는
아주 중요한 역활을 한겁니다

존경받는 다른 유대인 지도자들처럼
사람들을 구하지는 못했지만

 

유대인들이 겪은 일들을
기록으로 남겼죠

 

그 하루 하루를

 

일기를 살펴보면
알겠지만

한 주 내내
일에 매달렸고

휴가도 쉬는 날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매일의 일을
기재했어요

날씨라던가

오전에 외출한 곳이라던가

 

일어난 모든 일들을

빠짐없이 적었어요

 

몇 년 동안

대충 3년에 걸쳐
그 어떤 힘에 이끌려

이 일을 밀고 나갔어요

독일군에게
목숨을 위협 받는 상황에서

 

이런 의미에서

이 일기가...

장황하지 않게
기술 되었기에

 

그 문장들에
담긴 생각과

 

사물을 어떻게 바라보고

인식하고 반응했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쓰지 않은 일까지도
짐작 할 수 있어요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 지

 

일기는 끝까지

암시의 연속이에요

 

그리스 신화를
인용해서

독약이 묻은 망토를
입은 것 같다고 했어요

 

고대의 헤라클레스처럼

 

바르샤바의 유대인 사회에
드리워진

파멸의 기운을 감지 했어요

 

그 흐름의 의미를 탁월하게

일기에 묘사해 놨습니다

 

이런 식으로
빈정댔습니다

1941년 12월 경에
이젠 지식인들도 죽어간다고 했어요

그 전까지는
대개 빈곤층들이었는데

1941년 12월에는

지식인층도
아사지경에 몰린 겁니다

더우기...

왜 특별히 지식인들을
언급 했을까요?

게토 내에서의 사회계층의
차이를 설명한 거죠

기근에 대처하는
능력으로

대개 하류층이 먼저 죽고

중산층은 좀 더 견디죠

중산층 중에서도
꼭대기에 자리한 지식인들이

아사지경이라는 건
그만큼 상황이 아주 심각하다는 거죠

 

바로 이런 뜻입니다

게토의 1일 평균 칼로리 소모량이
1인당 1,200Kcal 였습니다

 

"무슨 문젠가? 뭐가 문제야?"
물었어요

 

돈을 하소연 하러
온 사람한테

 

그 사람은
"돈이 필요해요

식량 때문이 아니라
집세 때문에

건물 집세를 내야 해요

거리에서
죽긴 싫어요"

 

이것이 체르니아코프가
일기를 서술한 방식입니다

 

품위의 뜻...
그 승인

어떤 민원인이 그랬다는 거죠?

- 네
- 돈을 달라고?

식량이 아니라
집세를 내야 했기에

길거리에서
죽지 않으려고

실제 길거리에
시체들이 널려 있었죠

 

신문지에 덮인 채...

왜 집이 식량보다
더 중요 했을까요?

그래봐야 먹고 살아남을
식량도 없었어요

차라리 굶어 죽지
거리에 버려지긴 싫었다는 거죠

어차피 죽는 건
마찬가지라,죽는 마당에...

물론 그렇습니다

이런 식으로 유대인들의 사정을
은근히 비꼬았어요

계속 아주
묘한 표현을 써가며...

장례식장 앞에서
밴드가 연주를 하고

술주정뱅이가
영구차를 몰고

죽은 아이들이
운동장을 뛰어다니고

좀 빈정거리는 눈으로
죽음을 대했죠

죽음 속에서
생활 했으니까

 

게토에는
가보셨습니까?

 

몇 번이요
체르니아코프 만날 때

 

당시 그곳의 형편이
어땠습니까?

 

끔찍했지요
네,오싹하리만큼

 

그랬습니까?

 

한번 보고는
다시 안 가려고 했어요

 

부득이 할 때만 갔어요
통털어서

 

한 두번 갔을 겁니다

 

우리 행정기관에서는

 

게토의 노동인구를
유지 시키려 했고

 

특히 발진티푸스 같은
전염병을 막으려고 애썼어요

 

심각한 위험이었으니

 

 

네?

 

발진티푸스
이야기 좀 하죠

 

의사가 아니라서
발진티푸스가 아주

 

치명적인 전염병이라는 것만
알아요

 

페스트처럼
파괴적이고

 

게토에 국한되지
않으리라는 것도

 

발진티푸스가 발생하면...
그 가능성 만으로도

 

공포에 휩싸이고...

 

폴란드나 독일인들에게도
여파가 미칠 것이었어요

 

왜 게토에서
발진티푸스가 발생 했습니까?

 

실제 발생했는 지는
모르지만

 

기근 때문에
그럴 위험성이 있었어요

 

충분한 식량이
없었으니까

 

아주 비참했어요

 

우리 측 행정기관에서는

 

게토에 최대한
식량을 공급해

 

전염병의 진원지가
안 되도록 했어요

 

인도적인 면은
별도로 하고서라도

 

발진티푸스가 발생하면...
실제는 안 그랬지만

 

게토에서 멈출 게
아니었어요

 

체르니아코프는
또 이렇게 적었습니다

 

게토가 참상을 겪는
이유 중 하나는

 

독일인들의
두려움 때문이다

 

네,그렇습니다!
발진티푸스의 공포

 

독일인들이 늘 발진티푸스를
유대인과 연관시킨다고 했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럴 근거가 있었겠지요

 

아무튼
게토에 몰려 있는

 

그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곳엔

 

바르샤바의 유대인뿐 아니라
나중에 이주한 다른 사람들도 있었고

 

위험이 점점 커져 갔어요

 

바르샤바에
한 여자가 살았습니다

 

어떤 남자를
사랑하게 됐는데

 

그 남자가

 

얻어 맞아

 

내장이 튀어나올 정도의

 

심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여자는 손으로 직접
내장을 집어넣고

 

구호소로 옮겼지만
죽고 말았습니다

 

남자는 공동묘지에
묻혔는데

여자가 손수

매장 했습니다

 

체르니아코프에게는
이 간단한 사례가

궁극적인
선행이었습니다

 

한 번도
저항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건
신경 안 썼어요

몇몇 다른 유대인들에게

혐오감을
표시한 게 전부였어요

 

영향력을 써서
미리 빠져나간 유대인이나

간츠바히 같은
부역 유대인들한테

 

독일인들에게는
아무 반감도 표하지 않았어요

그건 논외였습니다

 

독일인들의 말에

아무 이의를 달지 않았어요

다만 가끔씩
토를 달았죠

 

논쟁 중에
어떤 의견을 내는 정도로

뭐 논쟁하는 일도
거의 없었지만

부탁하고 호소했지만
논쟁은 하지 않았어요

토를 단 건

장벽을 쌓을 때의
비용 부담 문제였는데

 

이렇게 말했죠
"장벽을 쌓는 일은

위생상의 문제로
유대인들을

외부의 독일인들과
폴란드인들한테서 격리하자는 건데

왜 이래야 하느냐

왜 유대인이
비용을 부담해야 하느냐

보호 받는 사람들이
약값을 치루는 건데

장벽이 예방제라면
독일인들이 내야 한다"

아우에르스발트 행정관이
대꾸했습니다

"아주 바람직한 견해다

나중에 국제회의
대표로 가도 되겠다

하지만 지금은
장벽 대금을 내라"

체르니아코프는
이 모든 걸 적었습니다

이 논쟁과
아우에르스발트의 답변까지

이 정도가
독일인들이 저지르던 짓에 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이었어요

그저 달게 받아들였어요

 

유대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수수방관 하면서

최악의 사태에
이르기까지

 

독일의 바르샤바 게토
정책이 있은 줄 아는데

 

어떤 정책이었습니까?

 

나보다 더 잘 아실텐데요

 

결국엔
'최종 해결책'이라는

 

몰살 정책이었지만...
우리는 전혀 몰랐어요

 

우리의 임무는
게토를 유지시키고

 

유대인 노동력을
보존하는 것이었어요

 

이 행정 목표는

 

실제 나중에 시행된

 

몰살로 이끄는 방식과는
전혀 달랐어요

 

네,하지만 1941년에
게토에서 매달

 

얼마나 죽는 지는
알고 계셨겠죠?

 

지금은 모르겠어요...
그때는 알았겠지만

 

알고 계셨습니다
정확한 숫자를

 

그게 아마...

 

네,매달 5천명입니다

 

- 5천명이요?
- 네,그게...

 

상당 수죠

 

그야 상당하지요
하지만 그때는

 

게토 인구가 지나치게
많았어요. 그래요

 

지나치게...

 

지나치게

 

좀 철학적인 질문입니다만

 

게토를 어떤 관점으로
보십니까?

 

내가 아는 바로는

 

과거의 역사에도
게토는 늘 있었어요

 

유대인 배척은
독일의 고안품이 아니고

 

2차대전 때
시작된 것도 아니에요

 

폴란드인들도
유대인을 박해 했어요

 

하지만 바르샤바 같은
대도시

 

중심가의 게토는...

 

좀 특별하지요

 

게토를 유지 시킨다는
말은...

 

우리 임무는
게토를 말살 시키는 게 아니라

 

살아 남도록
유지 시켜...

 

'살아 남도록'은
어떤 뜻으로...

 

그게 문제였지요

 

총체적인 문제...
어떻게 노동력을 보존해서...

 

사람들은 거리에서
죽어 갔습니다

 

사방에 시체였습니다

 

- 그랬지요
- 네

 

그게 역설이었지요

 

역설로 보십니까?

 

그렇고 말고요

 

왜 그렇습니까?
설명 해주시죠

 

아니요

 

어째서요?

 

뭘 설명하라구요?

 

실제로...

 

매일 게토에서 유대인들을
몰살 시키고 있었습니다

 

체르니아코프에 따르면...

 

원활한 유지를 위해
필요했던 일은

 

더 다량의 식량배급이나

 

인구 감축이었어요

 

인도적인 식량배급은
왜 안됩니까?

 

왜 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독일 측
결정이었습니까?

 

게토를 굶주리게 하는

 

어떤 결정 사항도 없었어요

 

몰살의 큰 결정은
훨씬 뒤에 이뤄졌어요

 

그렇습니다,나중에
1942년에

 

바로 그래요!

 

3년 뒤에

 

그래요
내 기억 속의 우리 임무는

 

게토의 관리였고

 

자연히
과잉인구에 따른

 

불충분한 식량공급

 

그래서 지나치게 높은
사망율이 불가피했어요

 

 

식량과 환경 등 그런 환경에서
게토를 '유지' 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왜 유대인들이 그런 방식에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유대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요

 

체르니아코프가 전쟁 전에
그 영화를 본 것 같군요

침몰하는 배의 선장이

오케스트라에게
재즈 연주를 지시하는 영화 말입니다

1942년 7월 8일의
일기에

자살하기
2주 전쯤인데

자신을 침몰하는 배의
선장으로 표현 했습니다

그래요

물론 실제로는
재주 연주가 아니라

어린이 축제 같은...

네,체스대회나 연극

어린이 축제도 열었죠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걸 그대로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 상징성이죠

이런 문화행사나 축제는

단순히 사기 진작의
차원이 아니라

체르니아코프가
밝혔듯이

게토 주민들의 심리적 상태의
상징 같은 것이었어요

곧 가스실로 향하게 될
병든 사람들을 위한

치유와 진정의
과정이었고

결코 어른이 되지 못할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의 장이었으며

실업이나 파산에 처해
곤경을 겪는 이들한테

일자리를 마련해주는
공간이었어요

삶이 지속될 것처럼
그렇게 지탱했어요

그 동안 그 모든
나쁜 조짐들을 목격하고서도

게토에서 살아 남으려는
강한 생존의식을 발휘 했어요

그 생존의 비결은

"버티어야 한다

다른 방법이 없다

권리를 최소화 하고
요구를 최소화 하고

손실을 최소화 하면서

이대로 이어나가야 한다"

그 무엇보다도

 

지속성이 최우선이었죠

일기에서 침몰하는 선장으로
자신을 비유했을 때는

앞으로 닥칠 일을 알고...

알았어요,알다마다

종말의 기운을
감지했던 것 같아요

아마 1941년 10월쯤에

이듬해 봄
바르샤바의 유대인들의 운명에 관한

'불안한 풍문'을
언급했을 때

또한 SS 수송책임자
비쇼프한테서

어차피 게토는 임시방편이라는
말도 전해들었죠

그럼 뭐냐는
설명은 없었지만

알고 있었어요
1월에

리투아니아 유대인들이
올 거라는

소식과 소문도 듣고

아우에르스발트가 돌연
베를린으로 가버린 일도 우려했죠

1942년 1월 20일에

베를린의 회의에서
'최종 해결책'을 채택한 그 날이죠

 

반제회의(Wannsee Conference)에서

 

베를린
반제회의 장소

 

체르니아코프가 베를린의 회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 지는 정확히 몰랐어도

 

행정관이 베를린에 간 일에는
의혹을 품었죠

생각을 했죠
왜?

 

최소한 일이 심상치
않다는 건 짐작했죠

 

그렇게 2월이 되자
소문이 더 무성해졌고

 

3월에는 소문이
더 구체적이 됐어요

 

그 때부터
기록에 적습니다

 

루블린 게토의 유대인 송출
미엘레츠,크라코프,르보프

 

그리고 알았어요

바르샤바에서도 곧
무슨 일이 일어나리란 걸

 

그 다음 일기들부터는

줄곧 근심과 우려가
담겨 있어요

 

베우제츠
학살수용소 장소

 

체르니아코브가
루블린 게토와

크라코프 게토 유대인이
송출 됐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가

 

1942년 3월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베우제츠로 갔습니다

 

일기에 의문이 나옵니까?
그 사람들이 어디로 보내졌고

 

어떻게 됐을까 하는

아니요

 

일체 없어요

 

그 사람들 운명에
관한 언급이 없어요

 

수용소의 존재를

알았는 지
몰랐는 지

 

우리로서는
가늠할 수 없어요

 

다만 일기에 그 내용이
안 나온다는 것뿐

 

어쨌든
다른 소식통들을 통해

바르샤바에도
학살수용소의 존재가 전해졌어요

6월 경에는 분명히

 

체르니아코프 회장이
왜 자살 했습니까?

 

게토에 더는

 

미래가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겠지요

 

유대인들이 죽게 되리란 걸
저보다 먼저 알았을 겁니다

 

내 생각엔
유대인 측에는 이미

 

뛰어난 첩보조직이
있었어요

 

우리보다도
정보가 빨랐어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네,그래요

 

유대인들이
더 잘 알았다고...?

 

네,분명해요

 

믿기 어렵군요

 

유대인들이
어떻게 될 지

 

독일 행정기관에서는
전혀 몰랐어요

 

트레블링카로의
첫 송출이 언제입니까?

 

아우에르스발트가
자살하기 전일거에요

 

아우에르스발트요?

 

아니,체르니아코프 말입니다
죄송해요

 

7월 22일

 

날짜가...

 

1942년 7월 22일
송출이 시작됐고...

 

 

트레블링카로...

 

체르니아코프는 7월 23일
자살 했습니다

 

네,그렇군요...

 

바로 다음 날

 

바로 다음 날
그렇게 된 건...

 

비로소 깨달은 거지요
자기 생각엔

 

독일 측과의
우호 관계가

 

유대인들에게
최선의 이익이라 여겼는데

 

그 생각이
그 꿈이 무산된 거지요

 

그 생각은
꿈에 지나지 않았다고?

 

네,그 꿈이 사라지자

 

필연적 수순을
밟은 거겠지요

 

자살하기 얼마 전에
체르니아코프가 마지막 일기를 썼습니까?

 

마지막으로 쓴 게...

죽기 몇 시간 전이었요

 

어떤 내용입니까?

 

"3시다

 

지금까지 4천명이
떠날 채비를 갖췄다

 

명령은 4시까지
9천명이었다"

 

이것이 저녁에 자살하게 될 사람이
마지막 기재한 내용입니다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들이
트레블링카로

처음 송출되던 날이
1942년 7월 22일이었고

 

바로 다음 날
자살했군요

그렇습니다. 7월 22일
바로 7월 22일에

SS 장교 회플러의
호출을 받았는데

'재정착'
담당이었습니다

바르샤바의 유대인들을
수송하러 온 사람이었죠

회플러의 말이
22일에요

 

여기서 또 한가지
눈길을 끄는 점은...

체르니아코프가
너무 동요한 나머지

일기에 날짜를
잘못 기재 했어요

1942년 7월 22일이 아닌
1940년 7월 22일 이라고

 

아침 10시에
회플러가 전화를 했는데

"전화가 단절될 것이다

운동장의 아이들을
유대인회 건물로 이동 시켜라

남녀노소
전 유대인들이

동쪽으로
추방된다고 전하라"

'동쪽으로'

 

언제나 동쪽이죠

"오후 4시까지
6천명이 동원되어야 한다

최소한의
하루 배정인원이다"

1942년 7월 22일 아침 10시에
이 연락을 받고나서

달려가
끈질기게 간청했습니다

예외 인원을 둬달라

유대인회 직원들과

복지요원들은
빼줘야 한다

고아들을
몹시 걱정하면서

계속 제외 시켜달라고
했어요

다음 날도
고아들을 구해낼 수 있을 지

자신이 없었어요

 

그 고아들을
돌봐줄 수 없다면

자신과의 싸움에서 진 거라
여겼어요

자기와의
투쟁에서의 패배

 

왜 그렇게 고아들을...

그곳에서
가장 힘없는 층이었어요

앞날이 있는
어린이들인데

부모도 없이 길을 가면서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어요

이 고아들마저
예외가 없고

독일 SS 장교의
말로나마 약속도 없고

어떻게 될 지 모르겠다는
한마디조차 없이

그저 귀를 막고 있는데

어떤 생각이 들겠어요?

 

아이들도 돌보지 못하는데
달리 뭘 하겠어요?

 

누군가가 전하는데

 

일기장을 덮고
메모 한 줄을 적었답니다

 

그 내용은

 

"저들이 아이들을
죽이라고 한다

 

내 손으로"

 

아담 체르니아코프
(1880-1942.7.23)의 묘

 

게토를 바람직한 구상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치구역 같은?

 

네,그래요

 

소 주권국처럼?

 

잘 운영 됐어요

 

하지만 죽음의
자치구역이었지 않습니까?

 

지금 보면 그렇지만
당시에는...

 

그때도요

 

아니요

 

체르니아코프가
그랬습니다

 

"우리는 힘없는
꼭두각시다"

 

 

아무 힘없는

 

네,그랬어요...

 

권력은 독일인들
손에 있고

 

 

권력자며 상전

 

네,맞아요

 

체르니아코프는
단지 도구였습니다

 

네,수완 있는...

 

유대인 자치는
잘 운영 됐어요,정말로

 

3년 동안은 그랬지요

 

1941,1942,1943...2년 반
결국엔...

 

결국은...

 

'잘 운영 됐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종말이 왔는데

 

자기보전을 위해서요

 

아니,죽음을 위해!

 

네,하지만...

 

자치니 자기보전이니...

 

지금이야 말하기 쉽지요

 

비인간적인 상태였다고
시인하셨어요

 

잔인하고
끔찍했다고

 

 

그럼 그때 벌써
분명해 진겁니다

 

아니,몰살 같은 건
분명치 않았어요

 

그건 결과론이고...

 

몰살이 그리 손쉬운 일은 아닙니다
한 단계를 취하고

 

다음 단계,그 다음
또 그 다음...

 

 

그 과정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되풀이 하지만
몰살이 처음 일어난 곳이

 

게토는 아니었어요
다만 거기서는 소개만...

 

소개요?

 

트레블링카로의 소개

 

게토를 무기로 쓸어버릴 수도
있었어요

 

결국 봉기 뒤에
그렇게 됐지만

 

내가 떠난 뒤고
초기에는...

 

란쯔만 씨,이런 식으로는
답이 안 나옵니다

 

결론을 내릴 수 없어요

 

그럴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지금은 알지만
그땐 몰랐어요

 

그런 위치셨다구요?

 

그랬어요

 

중요인사였습니다

 

내 역활을
과대평가 하시는군요

 

아닙니다

 

행정기구의
2인자였습니다

 

바르샤바
'유대인 구역'의

 

하지만 힘은 없었어요

 

특별한 자립니다

 

막강한 독일 권력 구조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작은 역활이었어요

 

당시 28세 부관의 위치를
과대평가 하시는...

 

- 30살입니다
- 28살

 

30대면...

 

원숙한 나이입니다

 

네,하지만 27살에

 

학위를 딴 법률가로서는
첫 걸음이었지요

 

박사학위도
있으셨고

 

간판에 지나지 않아요

 

아우에르스발트도
땄습니까?

 

아니요
학위와는 무관해요

 

법학박사...

 

전후에는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등산 출판 일을
했어요

 

그렇습니까?

 

등산 안내서를
써서 출간하고

 

등산 잡지를 펴내고

 

등산 애호가시군요?

 

 

산의 공기...

 

 

태양과 신선한 공기...

 

게토의
공기 같지 않지요

 

당신에게 한마디씩
적을 때마다

 

잉크에 눈물 자국이
번지네요

 

우리가 함께했던
그 찬란한 날들을

 

눈물로 적고 있어요

 

우리가 함께했던
그 찬란한 날들이

 

이제는 다시
오지 못하겠지요

 

이토록 가슴이
메어지는데

 

그 무슨 말을 할까요
내 사랑

 

당신은
눈물 흘리지 말아요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에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이대로 이대로
게르트 슈나이더 모녀(뉴욕)

 

헤어지기로 해요
라트비아 리가 게토 생존자

 

이대로 이대로

 

가슴 아픈
사랑을 끝내요

 

그날 밤 그 달을
아직 기억하나요

 

언제나 운명을
같이 하기로 했죠

 

하지만 이제는
서로 다른 길을 가야 해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로하메 하게타오트
키부츠 박물관

 

게토 전사 키부츠
이스라엘

 

유대전사기구(ZOB)는
1942년 7월 28일

 

바르샤바 게토에서
정식으로 결성 되었다

 

트레블링카로의
대량 송출이

 

9월 30일 중단된 뒤

 

게토에는 6만명 가량의
유대인들이 남아 있었다

 

1943년 1월 18일
송출이 재개 되자

 

절대적인
무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ZOB 대원들은
항전에 나서

 

전투를 시작했고
독일 측에서는 아연실색 했다

 

전투는 3일 간
지속 됐다

 

나치는 인명피해를 입고
철수했고

 

유대인들이 버려진
무기들을 획득했다

 

송출은 중단 됐다

 

비로소 독일 측에서는

 

싸워서 게토를 점령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1943년 4월 19일
유월절 밤에

 

전투가 시작 됐다

 

목숨을 건 사투였다

 

시마 로템
일명 '카직'

 

이작 주커만
일명 '안텍'

 

ZOB 부사령관

 

전후에
술을 마시기 시작했어요

 

아주 힘들었어요

 

끌로드 씨
제 심정을 물으셨는데

 

누가 내 심장을
핣으면

 

그대로 중독될 겁니다

 

모데카이 애니레비츠의
지시로

 

Z.O.B 총사령관

 

 

안텍은 독일군이 공격하기
6일 전 게토를 떠났다

 

맡은 임무는:

 

폴란드 레지스탕스 지도자들에게
무기를 요청하는 일이었는데

 

거부 당했다

 

게토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끔찍 했는 지

 

말로는 형언할 수가
없어요

 

거리에 나가보면
if you can call them that,

 

발에 걸리는 시체 말고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어요

 

도무지 지나 갈
공간이 없었어요

 

전사들은 독일군 뿐 아니라
굶주림과 갈증과도

 

싸워야 했어요

 

We had no contact with the outside world,

 

바깥 세상과는
전혀 소통이 안 되고
cut off from the world.

 

완전히 고립된
처지였어요

 

이 지경에 이르니

 

우리가 왜 계속 싸워야 하는 지도
더는 알 수 없게 되었어요

 

그래서 생각해 낸 일이
게토 밖의

 

바르샤바 아리아인 지구로
뚫고 나가보자는 것이었어요

 

5월 1일 직전에

 

지그문트와 저를 보내

 

아리안 지구의
안텍과 접촉하라고 했어요

 

보니프라트라스카 거리에
땅굴이 있었는데

 

그리로 해서
아리안 지구로 갔어요

 

이른 아침이었어요

 

우리는 갑자기
대로 복판으로 나오게 됐어요

 

날 좋은
5월 1일 아침녘에

 

한 길에서 멀쩡한 사람들 가운데
얼떨떨하게 서있는 그 꼴이라니

 

외계에서 온
종족들 모양

 

돌연 사람들이
달려 들었어요

 

지치고 앙상한 모습에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으니

 

게토 주변에는
항상 유대인들을 잡으려는

 

수상쩍은 폴란드인들이 있었어요

 

구사일생으로
도망쳤어요

 

바르샤바의
아리안 지구는

 

예전의 평상시처럼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었어요

 

카페와 식당도
정상적으로 영업하고

 

버스와 전차들...

 

영화관도 상영 중이고

 

게토는 정상적인 삶에서
떨어져나간 섬 같았어요

 

우리의 임무는
이작 주커만과 접촉해

 

구조작전을
펼치는 것이었어요

 

게토에 아직 생존한

 

소수의 대원들을
구출하려는

 

간신히
주커만과 만났고

 

하수도 인부
2명도 구했어요

 

5월 8-9일 밤에

 

다른 동료인 리스젝과

 

하수도 인부 둘과
게토로 돌아가기로 했어요

 

통금시간이 되자
하수구로 들어 갔어요

 

게토의
지하 배치도를 잘 아는

 

두 인부만
믿고 있었는데

 

도중에
돌아가야겠다면서

 

우리를 떨쳐버리려 하길래
총을 꺼내 위협했어요

 

하수구의
어느 지점에 이르러

 

인부 하나가
게토의 아래까지 다 왔다고 했어요

 

인부들이 달아나지 못하게
리스젝이 감시 했어요

 

밀라 18가
Z.O.B 본부 은신처

 

맨홀 뚜껑을 들어 올리고

 

게토로 올라 왔어요

 

밀라 18가 은신처는
하루 차이로 어긋났어요

 

돌아온 게
5월 8-9일 밤인데

 

8일 날 오전에 독일군들이
은신처를 발견한 거에요

 

바르샤바의
게토 전사 기념비

 

대다수 대원들은
자살하거나

 

독일군이 투입한
가스로 질식사 했어요

 

게토 전사 기념비의
복사 모형 (예루살렘)

 

프란치스칸스카 22번가의
은신처로 갔어요

 

암호를 외쳤지만
응답이 없었어요

 

게토 곳곳을
뒤지고 다니는데

 

갑자기 폐허에서
여자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요

 

아무 것도 안 보이는
어둠 속이었어요

 

집들은 모두
폐허로 변했는데

 

그 목소리만 들렸어요

 

무슨 악령에 씌운
기분이었어요

 

돌더미 속에서
목소리가 새나와서

 

그 주위를 돌았어요
시계는 안 봤지만

 

30분 가량을
뒤지면서

 

저를 부른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으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찾지 못했어요

 

다 불질렀던가요?

 

그때로 봐선
불기가 다 사그러들었지만

 

아직 연기가
피어 올랐고

 

살이 타는
지독한 냄새가 풍겼어요

 

분명히 산 채로
태운 것 같았어요

 

계속 다니면서

 

은신처마다
대원들을 찾아봤지만

 

어디 가도
마찬가지였어요

 

'얀'이라는
암호를 대면서

 

폴란드 이름
'얀'이요?

 


그런데 응답이 없었어요

 

그렇게
은신처들을 돌면서

 

게토에서
몇 시간을 보낸 다음

 

하수구 쪽으로
돌아 왔어요

 

그때 혼자였습니까?

 

네,계속 혼자였어요

 

그 여자의 목소리와

 

하수구에서 나오다
마주친 한 남자를 빼면

 

혼자서 게토를
헤매고 다니면서

 

산 사람이라곤
못 만났어요

 

한 순간이
기억나는데

 

아주 평온한
마음 상태가 되면서

 

혼자 그랬어요
"내가 마지막 유대인이다

 

새벽을 기다리자
독일군이 와도 좋다"